메밀꽃 필 무렵

도서명: 메밀꽃 필 무렵(1936)
글쓴이: 이효석(1907-1942)

줄거리

봉평의 어느 여름 장날, 신통치 않던 하루 장사를 일찍 접은 허 생원과 조 선달은 충줏집으로 술을 마시러 간다. 그곳에서 젊은 장돌뱅이 동이가 충줏집과 놀고 있는 것을 본 허 생원은 동이에게 호통과 함께 따귀까지 올려 붙인다. 그런데 밖으로 나간 동이가 황급히 달려와 동네 아이들이 허 생원의 나귀를 괴롭힌다고 알려준다. 반평생 길을 같이 떠돌아온 나귀에게서 외롭고 처량한 자신의 신세를 보아온 허 생원의 마음은 좋지 않다.

해가 꽤 기울어질 무렵, 허 생원, 조 선달, 동이 세 사람은 다음 장이 들어설 대화장을 향해 함께 길을 떠난다. 허 생원은 달빛 아래 메밀꽃이 지천인 길을 걸을 때면 으레 그래왔듯이 뒤에 오는 조 선달에게 옛사랑의 추억을 풀어놓는다. 무더운 여름 밤 봉평의 물레방앗간에서 울고 있는 성서방네 처녀와 우연히 만나 보낸 하룻밤 사랑 이야기. 고개를 넘어 큰 길에 접어 들면서부터 나란히 걷게 된 동이에게 허생원은 낮에 공연히 심술 부렸던 일을 사과하고 그참에 아비 모르고 자란 동이의 사연을 듣게 된다. 개울을 건너다 그의 어머니가 봉평 출신이라는 것을 듣고는 발을 헛디뎌 물에 빠지고 만 허 생원. 동이의 등에 업혀 물을 건너며 뼈에 사무치는 따뜻함을 느낀 그는 대화장 다음에는 동이 어머니가 있는 제천장으로 함께 가자고 제안하며 걸음을 재촉하는데, 문득 그의 눈에 자신처럼 동이도 왼손잡이인 것이 들어온다. 기울어지는 달빛 아래로 둥실둥실 가벼워지는 허 생원의 마음 따라 나귀의 방울소리도 한층 청청하게 울린다.

감상

이효석의 대표작이자 한국 현대 소설에서 빼놓을 수 없는 작품 <메밀꽃 필 무렵>. 장이 열린 봉평과 다음 장을 찾아 대화로 넘어가는 팔십 리 고갯길의 공간적 배경, 그리고 여름날 오후부터 밤까지 채 하루도 못 되는 짧은 시간적 배경 속에서 장돌뱅이 허 생원과 조 선달, 동이 셋을 중심 인물로 한 이 소설의 주제는 일반적으로 ‘떠돌이 삶의 애환 속에 펼쳐지는 인간 본연의 애정’이라고 요약되고 있다.

메밀꽃으로 하얗게 덮인 산길, 그 위로 내리는 한여름밤의 달빛, 한곳에 머무르지 못하는 장돌뱅이 삶의 외로움과 고단함… 이 소설이 낭만적인 이유를 열거하는 데는 단 몇 가지만으로도 충분해 보인다. 여기에 시적 묘사와 감칠맛 나는 생생한 우리말까지 더해지고 있으니.

그래서 사람들은 그의 작품을 두고 소설이 아니라 시를 썼다고도 말한다. 소설가 김동리가 이효석에 대해 ‘소설가를 배반한 소설가’라고 한 언급도 종종 인용된다. 사실 앞뒤 맥락을 떼고 이 표현만 봐서는 소설가를 배반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아리송하지만, 어쨌거나 다음의 문장을 보면 이 작품이 지닌 아름다움에 관해서는 대부분 쉽게 공감할 것이다.

이지러는 졌으나 보름을 갓 지난 달은 부드러운 빛을 흐뭇이 흘리고 있다. (···) 길은 지금 산허리에 걸려 있다. 밤중을 지난 무렵인지 죽은 듯이 고요한 속에서 짐승 같은 달의 숨소리가 손에 잡힐 듯이 들리며, 콩포기와 옥수수 잎새가 한층 달에 푸르게 젖었다. 산허리는 온통 메밀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이 흐뭇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붉은 대궁이 향기같이 애잔하고 나귀들의 걸음도 시원하다. 길이 좁은 까닭에 세 사람은 나귀를 타고 외줄로 늘어섰다. 방울소리가 시원스럽게 딸랑딸랑 메밀밭께로 흘러간다.

소설에는 공감각적 표현이라고 할 만한 묘사들도 정말 많이 나온다. 달빛 하나만 두고도 ‘꽃이 소금을뿌린 듯이 흐뭇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라거나 ‘짐승 같은 달의 숨소리가 손에 잡힐 듯’ 들린다거나 ‘옥수수 잎새가 한층 달에 푸르게 젖었다’고 하는 식이다. 말없이 담배를 빨 때는 ‘구수한 자줏빛 연기’가 밤기운 속에 흘러서 녹는다고도 했다.

탁월한 묘사가 더욱 힘을 갖는 것은 그 표현들 속에 담긴 이야기의 힘과 짜임새라고 생각한다. 그 부분이 없었다면 이 작품의 매력은 크게 줄어들었을 것이다. 아름다운 묘사들이 가득한 글을 읽을 때 종종 멀미나 공허함을 느끼게 되는데 이 소설을 읽을 때는 전혀 그러지 않았다.

동네 아이들에게도 놀림거리가 되는 늙은 나귀를 향한 허 생원의 각별한 마음은 나귀와 그의 처량한 신세를 자연스럽게 연결 지어 바라보게 만든다. 달밤 물레방앗간에서 만난 성서방네 처녀와의 과거 인연과 장돌이를 하며 우연히 만나 달밤을 함께 걷게 된 동이와의 현재 인연도 그저 에둘러 던지는 질문과 암시로만 연결될 뿐인데도 그 은근한 짐작과 수긍이 또 다른 재미를 안겨준다. 소설이 발표된 지 80년이 넘은 지금 읽기에도 충분히 세련되게 느껴지는 이유 중 하나가 아닐까.

이 작품을 읽는 동안 나의 머릿속에 내내 떠오르는 하나의 이미지는 ‘길’이었다. 장돌뱅이로 반평생 걸어왔을 길, 셋이 한 줄로 걷던 좁은 산길에서 셋이 나란히 서서 걷던 큰 길, 동이의 등에 업혀 뼈에 사무치는 따뜻함을 느끼며 건너는 개울길···. ‘장에서 장으로 가는 길의 아름다운 강산이 그대로 그에게는 그리운 고향’이었던 허 생원은 이렇게 말한다. “난 거꾸러질 때까지 이 길 걷고 저 달 볼 테야.”

가능하다면 이 소설을 한 번쯤은 처음부터 끝까지 소리 내 읽어 보길 권한다.

단어장

궁깃거리다(→궁싯거리다): 어찌할 바를 몰라 이리저리 머뭇거리다.
칩칩스럽다: 지저분하고 끈덕지게 들러붙는 데가 있다.
각다귀: 각다귓가의 곤충. 남의 것을 뜯어먹고 사는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얽음뱅이(→얼금뱅이): 얼굴이 얼금얼금 얽은 사람을 낮잡아 이르는 말.
드팀전: 예전에, 온갖 피륙을 팔던 가게.
나꾸다: (은어) 훔치다
바리: 마소의 등에 잔뜩 실은 짐 또는 그런 짐을 세는 단위
고리짝(고리): 키버들의 가지나 대오리 따위로 엮어서 상자같이 만든 물건
약바르다(→약빠르다): 약아서 눈치나 행동 따위가 재빠르다
화중지병: 그림의 떡
대거리: 상대편에게 맞서서 대듦. 또는 그런 말이나 행동
짜장: 과연 정말로
서슬: 쇠붙이로 만든 연장이나 유리 조각 따위의 날카로운 부분 / 강하고 날카로운 기세
서름서름하다: 사이가 자연스럽지 못하고 매우 서먹서먹하다.
바(참바): 삼이나 칡 따위로 세 가닥을 지어 굵다랗게 드린 줄
부락스럽다: 거친 데가 있다
개진개진: 눈에 물기가 끈끈하게 맺혀 있는 모양
비슬비슬: 자꾸 힘없이 비틀거리는 모양
암샘: 동물의 암컷이 일정한 시기에 교미를 하려는 욕망을 일으키는 것
줄달음: 단숨에 내처 달리는 달음박질
백중: 음력 칠월 보름
장도막: 한 장날로부터 다음 장날 사이의 동안을 세는 단위(의존명사)
항용: 흔히 늘
사시장천(→사시장철): 사철 중 어느 때나 늘
널다리: 널빤지를 깔아서 놓은 다리
고의: 남자의 여름 홑바지
낫세: 나잇살
무던하다: 정도가 어지간하다 / 성질이 너그럽고 수더분하다
훌치다: 불꽃이 바람에 쏠리다 / 물체가 바람 따위로 휘우듬하게 쏠리다
해깝다: 가볍다의 방언
탐탁하다: 모양이나 태도, 또는 어떤 일 따위가 마음에 들어 만족하다
훗훗이: 마음을 부드럽게 녹여 주는 듯한 훈훈한 기운이 있게